박근혜 기준은 박정희 명예 회복…역사 전쟁 벌일 것"
2013년 새해가 밝았다. 이명박 정권이 막을 내리고 박근혜 정권이 닻을 올릴 날이 머지않았다.
박근혜 당선인은 18대 대선 과정에서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비판했다. '박근혜 당선은 이명박근혜 정권의연장'이라는 비판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며 선을 그은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이 이명박 정권과 본질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일까' 하는 세간의 의문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남긴 과제를 박근혜 정권이 얼마나 진정성 있게 풀어갈 것인지가 이 문제를 바라보는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프레시안>은 언론, 역사, 노동의 세 주제를 중심으로 이 사안을 짚어보고자 한다. 말의 길을 열고, 과거사의 진실을 규명해 국민의 억울함을 풀어주며,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에게 살길을 마련해주지 않는다면 박근혜 정권 역시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이명박 정권과 같은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편집자>
대통령 딸의 대통령 당선. 한국 현대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2012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박근혜 후보 당선 후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걱정스런 목소리가 나오는 대목 중 하나가 과거사 문제다. 박 당선인의 과거사 인식은 대선 과정에서도 여러 차례 논란이 됐다. 이 점은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된 문제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박 전 대통령은 역사에 남긴 발자취의 강렬함만큼이나 찬반 여론이 확연히 갈리는 인물이다. 박 당선인이 청와대의 주인으로 정해지기 전에도 논란의 대상이었다. 논란은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후에도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통령 문제와 맞물리면서 과거사 진실 규명 및 정리 작업이 박근혜 정부 출범 후 더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릴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과거사 진실 규명 및 정리 작업은 이명박 정부 들어 이미 퇴행한 상태다.
과거사 정리 작업에 관한 이러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날까? 2012년 마지막 날, 안병욱(65) 가톨릭대 교수에게 이에 대해 물었다. 안 교수를 찾아간 건 오랫동안 한국사를 탐구한 학자일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손꼽히는 과거사 문제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2000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을 맡으면서 과거사 정리 작업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은 안 교수는 노무현 정부 때는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 과거사위)에서 일했다.
국정원 과거사위에서 다뤘던 사건 중 하나가 대선에서 논란이 된 정수장학회 문제다. 2005년 국정원 과거사위는 5.16 쿠데타 세력이 고 김지태 씨에게서 부일장학회를 사실상 강탈했다고 발표했다.
그 후 안 교수는 노무현 정부 말기(2007년 1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장을 맡으며 과거사 정리 작업과 맺은 인연을 이어갔다.
안 교수는 <프레시안>과 한 인터뷰에서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보다 더 과거사와 관련해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며 "역사 전쟁이 전개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박 당선인이 "과거사 문제도 '박정희 명예 회복'이라는 기준에서 다룰 것"이라는 것이 그 근거다.
"이제 아버지를 놓아드렸으면 한다"는 박 당선인의 바람과 달리, 안 교수는 "박정희를 팔아서 먹고살려는 의식이 많은 사람에게 존재하는 한 박정희는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박정희 시대에 대한 오도된 환상"과 "박정희가 없었으면 한국 현대사가 존재하지 못했을 것처럼 과도하게 전제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문이다.
또한 안 교수는 진실화해위원장으로 일할 때를 돌아보며 "이명박 정부는 역사에 관해선 백치 수준이었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어느 것이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과 진실을 사회적으로 공인하는 것, 그 차이가 과거사 정리"라고 규정하고, 역사의 진실을 규명하고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돼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인터뷰는 가톨릭대의 안 교수 연구실에서 이뤄졌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이명박 정부, 역사에 관해선 백치 수준이었다"
프레시안 : 박근혜 후보의 승리로 대선이 마무리됐다. 어떻게 봤나?
안병욱 : 1967년부터 선거에 참여했고 전에도 충격을 받은 적이 있지만, 이번엔 좀 다르다. 12월 19일 이후 뉴스를 보지 않고 있다. 주변 사람들도 그렇다. 집단적 공황 상태에 빠진 것 같다.
1987년과 비교해보자. 그때도 선거 결과에 많은 사람이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그때는 핑계라도 댈 수 있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갈라선 게 결정적이었구나' 하는. 그런데 이번에는, 난 지금까지도 (야권이 패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이런 집단적 공황 상태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누가 특별히 '뉴스 보지 말자' 이야기한 것도 아닌데 적잖은 국민이 뉴스에서 눈을 돌려버리고 공황 상태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요즘, 과거 우리 역사에서는 어땠나 하는 것을 돌아보고 있다.
프레시안 :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한국에서 진행된 과거사 정리 작업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안병욱 : 세계적으로 과거사 정리 작업이 부각된 건 1980-1990년대인 것 같다. 그 전에 비슷한 예가 없던 건 아니지만, 인류사적인 새로운 트렌드가 된 건 그 시기다. 인종차별로 악명 높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만델라가 집권한 후, 과거의 인종차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부각됐다. 또한 쿠데타로 집권해 학살 등을 자행한중남미 국가들의 군사 정권들이 뒤집어지면서, 군사 정권 시기의 인권 침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됐다. 그러면서 과거 청산 문제가 세계적 추세가 되고 인류사 전환기의 새로운 역사적 과제로 제기됐다.
20세기 후반에 이뤄진 역사적 전환에는 과거사에 대한 정리와 청산이 필요했다. 프랑스 혁명 때는 지배층을 단두대에 보내 처리했다. 만약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프랑스 혁명 같은 방식의 역사 전환을 하려 했다면 어떻게 됐겠나. 아프리카 몇몇 나라에서 수십 년간 벌어진 내전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일각에는 '과거 문제를 왜 들추나? 통합과 화해로 나아가야지, 과거를 헤집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극단적인 비판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건 인류사의 전환에 대한 인식 없이 나오는 즉자적인 반대나 비판 논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보수 언론들이 대개 그렇다.
한국은 높은 수준의 과거사 정리를 경험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의 과거사 정리는 대개 특정한 단일 범주 내에서 이뤄졌다(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인종 차별, 중남미 국가들은 군사 독재 극복 등). 그런데 한국은 여러 가지를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게 좀 다르다. 식민지 잔재 청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독재 정권의 인권 침해 등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부분이 지난 10여 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과거 청산 과제로 제기됐다. 그것들을 손대서 (진실 규명을) 추진했다. (물론) '그 모든 것을 철저하게 했는가'와는 다른 이야기다.
"과거사 진실 규명 무산시키려 한 이명박 정부"
프레시안 : 과거사 진실 규명을 위해 만들어진 기구 중 하나가 진실화해위였다. 이명박 정부 때 진실화해위원장으로 일했는데, 역사 문제를 대하는 이명박 정부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안병욱 : 2007년 12월 1일 진실화해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그달 치러진 대선에서, 과거사 정리 작업을 집요하게 반대해온 한나라당이 승리했다. 그 다음해 정권이 바뀌자마자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에서 시작한 모든 것을 부인하는 정치를 했다.
과거사 정책도 그중 하나다. 이명박 정부는 과거사 관련 위원회 14개를 통폐합해 과거사 정책을 일괄 무산시키려 했다. 그 위원회들 때문에 국력이 낭비되는 것처럼 여론을호도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추진한 과거사 관련 작업들이 성과를 내지 못하고 중단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촛불 집회에 휩쓸리면서 이를 처리할 시기를 놓쳤다. 그 덕분에 위원회들이 애초에 법으로 제정된 기간 동안은 존속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법으로 제정된 최소한의 임무들은 마무리했다. 어느 정도 역할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평가가 다르겠지만 '문을 열었다', '시작이 반이다' 정도의 평가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진실화해위의 경우, 법을 만들 때부터 한나라당 때문에 이미 '누더기법'이었다. 법을 제안했던 기준에 비춰보면 굉장히 소극적인 법이었다. 예상된 과제를 처리할 수 있을 만한 법이 아니었다. 또한 한국전쟁 시기에 벌어진 비극의 실체를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법이었다. 그 실체는 (훗날) 조사 과정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서 진실화해위는 해야 할 일의 규모 등에 대해 어느 정도 로드맵이 있었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와는 달랐다. 진실화해위의 작업에서는 애초에 과거사로 정리하고자 했던 요지가 지극히 소략하게 다뤄질 수밖에 없었다. 한나라당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이 문제를 덮었다고 안도했을 것이다.
고립무원 상태에서 위원회를 운영해야 했기 때문에 그때까지 제기된 부분을 행정적으로 잘 마무리하는 정도의 역할밖에 할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조사 결과를 토대로) 국가 기관에 여러 가지 권고(과거사연구재단 설립, 한국전쟁 당시 학살 사건 배상 및 보상 특별법 등)를 했지만 어느 기관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과거사 정리 작업을 백지화하려던 정부였기에, 권고 사항을 귀담아듣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 같다.
프레시안 : 진실화해위원장에서 물러난 후 아쉬움이 많았을 것 같다. 후임자인 뉴라이트 출신 이영조 진실화해위원장은 5.18을 "민중 반란", 4.3을 "공산주의자가 이끈 폭동"으로 폄훼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안병욱 :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인정해주고, 거기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이 잘못을 시인하고, 그러면 피해자들이 그 사람을 용서해주고 마음으로부터 화해하는 게 과거사 정리의 본령이다. 그런데 (내가 퇴임한 후) 진실화해위에서 그분들을 위로해주기보다는 때에 따라 분노를 야기하는 일들이 있었다. 상당히 아쉽다.
더욱이 후임 위원장은 "위원회의 결정은 100퍼센트 진실이나 정의라기보다는 그 결정이 내려질 당시 위원들 다수의 판단일 뿐", "투표에 의한 진실, 다수결에 의한 진실일 뿐"이라며 진실화해위 결정의 신뢰성을 스스로 훼손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내가 위원장일 때는 대개 15명 위원의 만장일치를 이끌어냈고, 경우에 따라 표결도 했지만 별다른 이론 없이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또한 (이영조 위원장의) 발언들이 훗날 사법부에서 관련 사건 재심을 할 때 검찰 측 근거로 제시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프레시안 : 사법부의 법적 판단에서 요구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물적 증거를 과거사 정리 작업에서 요구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안병욱 : 프리실라 헤이너(<국가 폭력과 세계의 진실위원회> 저자)의 다음 말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뭐가 진실인지 우린 다 안다. 과거사 청산은 그렇게 다 아는 것을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어느 것이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과 진실을 사회적으로 공인하는 것, 그 차이가 과거사 정리다. 우리는 국정원, 보안사, 검찰, 사법부가 과거에 무엇을 잘못했는지 안다. 위원회는 그렇게 (경험적으로) 다 아는 사실을 공적으로 조사·발표·공인하고, 사법부는 재심을 통해 그걸 다시 인정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당시 4.3과 관련해 제주도민과 희생자 유족에게 사과한 것처럼 (정치권력이) 국가의 잘못을 시인하는 것, 이것이 과거사 정리의 핵심이다.
그런 측면에서 사법부와 과거사위원회는 다르다. 사법부는 형사재판에서 심증이 가더라도 명확한 증거가 없으면 처벌하지 못한다. 그런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문제에 사법부식으로 접근한다면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피해자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명확한 문서 기록은 없는 경우가 많지 않나. 사법부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증거에 입각해 처리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합리적인 수준에서 판단하라고 있는 것이 과거사위원회다. 또한 항시적 기구인 사법부와 달리 과거사위원회는 한시적으로 운영한다는 점도 다르다.
"박근혜의 과거사 기준은 박정희 명예 회복"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 출범 후에도 과거사 진실 규명은 필요한 작업이다. 박 당선인은 대선 과정에서 인혁당, 정수장학회 등의 문제로 곤욕을 치렀다. 다른 한편 박정희 정권 때 일어난 부마항쟁 관련자 및 긴급조치 피해자 명예 회복에 관한 법안들을 대통합 법안으로 제시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과거사 문제는 어떠할 것이라고 전망하는가.
안병욱 :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이 세 사람이 과거사 문제를 대한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노 전 대통령은 과거사 정리 작업을 국가 정책으로 적극 추진했다. 어느 정부보다 적극적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예전부터 과거사 문제에 남다른 관심이 있어서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때가 비로소 우리가 과거사 문제의 뚜껑을 열 수 있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과거사 문제에 관해 아무런 의식이 없는 멍청한 정부였다. 역사에 관해선 백치 수준이었다. 졸부 근성밖에 없었다. 이 대통령이 과거사 문제에 특별히 이해관계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과거사 정리 작업을 노무현 정부 때 했으니 그걸 뒤집어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했다. 그래서 과거사 관련 위원회들을 통폐합하려 했는데 못했다. 그 후 (드러내놓고) 특별히 과거사 위원회를 못살게 굴기보다는 우리가 요청하는 사항들을 아무것도 들어주지 않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박 당선인은 노 전 대통령과 반대편에 서 있다. "박근혜가 정치를 하는 건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다"라는 말이 새누리당에서 나오지 않았나. 그게 박 당선인의 핵심 키워드다. 과거사 문제도 '박정희 명예 회복'이라는 기준에서 다룰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보다 더 과거사와 관련해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다. 다른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으로 밀고 당기는 역사 전쟁, 투쟁이 전개될 것이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문제도 그 범주 내에서 똑같이 다뤄질 것으로 본다.
프레시안 : 이명박 정부가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의식이 없었다고 볼 수 있을까? 건국절 논란, 역사 교과서 수정 압박 등의 문제가 계속 발생하지 않았나.
안병욱 : 분명히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과거사 관련 성과를 제거하고 자기들 입맛에 맞게 재편하려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역사 교과서에 대한 터무니없는 이념 공세도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예컨대 5.18에 대해서도, '독재에 맞선 시민들의 민주화 투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왜곡된 정보를 받아들인 소수의 폭동'으로 몰아가려는 시도도 나타났다. 역사의 진실을 뒤바꾸려는 범죄다.
(하지만) 건국절 논란 같은 것들을 보면, 그건 이 대통령의 의지라기보다는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뉴라이트들의 이념 공세에 MB가 별다른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편승한 측면이 있다. 이른바 보수 세력의 뿌리를 튼튼히 한다는 측면이 강하게 작용한 일이었다. (이와 달리) 인혁당 사건, 정수장학회 등은 박정희와 직접 연결된 사안이다. 뉴라이트들로선 그런 부분까지 변명해줄 필요가 없다. 그런 과거의 명확한 인권 침해까지 감싸려 하면 자기들의 입지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박 당선인은 박정희와 직결된 문제 하나하나에서 다를 것이다. 인혁당에 대해서도 두 개의 대법원 판결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선거 초기에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제가 생기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사과 담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그 기자회견 내용을 엄밀히 따지면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반성이나 사과가 전혀 아니다. 박근혜 당시 후보의 말은 유권자를 상대로 한 면피성 발언일 뿐, 진정성이 드러난 부분은 없다. 앞으로 과거사 문제에서 혹시 박 당선인이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박정희 시절에 대한 명분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뤄지는 최소한일 뿐 우리가 말하는 과거사 정리의 뜻에서 출발하는 내용은 결코 아닐 것이다.
예컨대, 정수장학회와 관련해 박 당선인은 후보 시절 "김지태 씨는 부정부패로 지탄받던 사람으로, 처벌받지 않기 위해 먼저 재산 헌납의 뜻을 밝힌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것에서, 박 당선인의 뜻이 어디 있는지 명확하게 드러난다.
프레시안 : 박 당선인은 후보 시절 "이제 아버지를 놓아드렸으면 한다"고 말했다. 시쳇말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그만 걸고넘어지란 이야기다. 어떻게 보는가.
안병욱 : 삼국시대든 고려시대든 조선시대든 훗날 역사를 놓아준다는 것은 개념상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가능하지 않다. 다만 박정희 시대에 대해 감성적 접근에서 역사적 접근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있다. 그런데 왜 아직도 박정희 시대에 대해서는 우리가 감성적 접근에 상당히 구애받을 수밖에 없느냐 하면,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아직 이뤄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박정희 시대에 대한 오도된 환상이 끊임없이 영향을 끼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해방 이후 마치 박정희가 없었으면 한국 현대사가 존재하지 못했을 것처럼 과도하게 전제하는 것이다. 박정희를 팔아서 먹고살려는 의식이 많은 사람에게 존재하는 한 박정희는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박정희 팔아서 먹고살려는 의식 있는 한 논쟁 대상 될 수밖에 없다"
프레시안 : 박 당선인은 대선 때 노무현 정부에 대해 '민생과 상관없는 이념에 빠져 나라를 두 쪽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국가보안법, 사학법, 과거사 진실 규명 논란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들렸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호불호와 별개로, 당시 개혁 과제로 꼽혔던 사안들이다. 그와 같은 발언을 어떻게 보는가.
안병욱 : 사학법이 논란이 됐을 때 박 당선인은 문자 그대로 자신의 모든 걸 던져 사학 재단들의 입장을 관철시켰다. 사학 재단들은 기득권 세력의 대표적 표상 아닌가. 이런 박 당선인이 앞으로 어떤 정치를 할까? 개인적으로 전율이 일어날 정도로 박 당선인의 보수적·수구적 행태가 드러날 것이라고 본다.
국가보안법 부분도 문제다. 박 당선인을 비롯한 그쪽 세력은 거의 대부분 국가보안법을 왜 바꿔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1950년대식 사고에서 한 치도 벗어나기 못했다. 백보를 양보하더라도 이미 21세기에서도 10년 넘게 지난 지금 여전히 국가보안법을 붙들고 있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어떻게, 세계화 시대에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것인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19세기에 조선의 많은 지식인들이 위정척사론적인 사고 속에서 세계사의 변화에 대응하려 했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행태다.
프레시안 : 과거사 정리 작업의 기반은 역사에 대한 사회 전반의 올바른 인식이다. 그런데 '5.18도, 6월항쟁도 잘 모르는 20대가 늘어 걱정'이라는 이야기가 들린다.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친 교수로서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는가.
안병욱 : 주위 사람들이 '젊은이들이 5·18도, 유신도 모른다'고 하는데 난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대개 1990년 이후에 출생한 친구들인데, 5.18이나 유신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역사책에서 봤을 뿐인 이들에게 그런 상황을 겪었던 사람과 똑같은 감성을 가지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1970-1980년대에 일부 젊은이가 역사의식을 갖추고 유신 반대 운동, 전두환 반대 운동을 했던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소중한 유산이다. 그렇지만 그건 비상한 사태에서 나타난 특수한 측면이다. '지금 학생들은 그때보다 못하다'는 식으로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다만 '왜 6월항쟁이나 광주항쟁이나 유신 체제를 오랫동안 당장의 현실로서 이야기하는가', 문제는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보수 기득권 세력이 과거의 틀 속에서 한국 사회를 계속 끌고 가려고 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3.1운동이나 갑오농민전쟁 같은 것들은 이미 그 자체로 역사 속에서 단락을 지어 나아갈 수가 있는데, 박정희-박근혜 문제는 그렇지 않다.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의 90% 이상은 박정희의 딸이라는 점 때문 아닌가. 한국 정치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의 지형에서 약간의 변화만 있을 뿐 50년 넘게 그 틀이 바뀌지 않고 있다. 조선 사회가 성리학적 구조 속에서 500년을 지속하며 야기했던 문제들의 변형을 보는 것 같다.
아울러 왜 요즘 일부 학생들이 과거사 문제 등에 대해 올바르지 않은 주장을 하는 것인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상당 부분은 보수 언론의 왜곡된 보도 형태 때문이라고 본다. (끝)
박근혜 당선인은 18대 대선 과정에서 이명박 정부의 실정을 비판했다. '박근혜 당선은 이명박근혜 정권의연장'이라는 비판에 강한 거부감을 보이며 선을 그은 것이다. 하지만 '박근혜 정권이 이명박 정권과 본질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일까' 하는 세간의 의문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명박 정권이 남긴 과제를 박근혜 정권이 얼마나 진정성 있게 풀어갈 것인지가 이 문제를 바라보는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다. <프레시안>은 언론, 역사, 노동의 세 주제를 중심으로 이 사안을 짚어보고자 한다. 말의 길을 열고, 과거사의 진실을 규명해 국민의 억울함을 풀어주며, 벼랑 끝에 내몰린 노동자에게 살길을 마련해주지 않는다면 박근혜 정권 역시 민주주의를 후퇴시킨 이명박 정권과 같은 길을 갈 수 있기 때문이다. <편집자>
새해 연속 인터뷰 ① MB에게 맞선 언론인 5인 "박근혜, 또 부역자 보내면…" |
대통령 딸의 대통령 당선. 한국 현대사에서 처음 있는 일이다. 2012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박근혜 후보 당선 후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고 있다. 걱정스런 목소리가 나오는 대목 중 하나가 과거사 문제다. 박 당선인의 과거사 인식은 대선 과정에서도 여러 차례 논란이 됐다. 이 점은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관련된 문제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박 전 대통령은 역사에 남긴 발자취의 강렬함만큼이나 찬반 여론이 확연히 갈리는 인물이다. 박 당선인이 청와대의 주인으로 정해지기 전에도 논란의 대상이었다. 논란은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후에도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박 전 대통령 문제와 맞물리면서 과거사 진실 규명 및 정리 작업이 박근혜 정부 출범 후 더 어려운 상황으로 내몰릴 것이라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과거사 진실 규명 및 정리 작업은 이명박 정부 들어 이미 퇴행한 상태다.
과거사 정리 작업에 관한 이러한 우려가 현실로 나타날까? 2012년 마지막 날, 안병욱(65) 가톨릭대 교수에게 이에 대해 물었다. 안 교수를 찾아간 건 오랫동안 한국사를 탐구한 학자일 뿐만 아니라 한국에서 손꼽히는 과거사 문제 전문가이기 때문이다. 2000년 의문사진상규명위원을 맡으면서 과거사 정리 작업과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은 안 교수는 노무현 정부 때는 '국가정보원 과거 사건 진실 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국정원 과거사위)에서 일했다.
국정원 과거사위에서 다뤘던 사건 중 하나가 대선에서 논란이 된 정수장학회 문제다. 2005년 국정원 과거사위는 5.16 쿠데타 세력이 고 김지태 씨에게서 부일장학회를 사실상 강탈했다고 발표했다.
그 후 안 교수는 노무현 정부 말기(2007년 12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위원장을 맡으며 과거사 정리 작업과 맺은 인연을 이어갔다.
안 교수는 <프레시안>과 한 인터뷰에서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보다 더 과거사와 관련해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며 "역사 전쟁이 전개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박 당선인이 "과거사 문제도 '박정희 명예 회복'이라는 기준에서 다룰 것"이라는 것이 그 근거다.
"이제 아버지를 놓아드렸으면 한다"는 박 당선인의 바람과 달리, 안 교수는 "박정희를 팔아서 먹고살려는 의식이 많은 사람에게 존재하는 한 박정희는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박정희 시대에 대한 오도된 환상"과 "박정희가 없었으면 한국 현대사가 존재하지 못했을 것처럼 과도하게 전제하는 것"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주문이다.
또한 안 교수는 진실화해위원장으로 일할 때를 돌아보며 "이명박 정부는 역사에 관해선 백치 수준이었다"고 평가했다. 아울러 "어느 것이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과 진실을 사회적으로 공인하는 것, 그 차이가 과거사 정리"라고 규정하고, 역사의 진실을 규명하고 피해자들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돼야 한다는 뜻을 밝혔다.
인터뷰는 가톨릭대의 안 교수 연구실에서 이뤄졌다.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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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병욱 전 진실화해위원장. ⓒ프레시안(최형락) |
"이명박 정부, 역사에 관해선 백치 수준이었다"
프레시안 : 박근혜 후보의 승리로 대선이 마무리됐다. 어떻게 봤나?
안병욱 : 1967년부터 선거에 참여했고 전에도 충격을 받은 적이 있지만, 이번엔 좀 다르다. 12월 19일 이후 뉴스를 보지 않고 있다. 주변 사람들도 그렇다. 집단적 공황 상태에 빠진 것 같다.
1987년과 비교해보자. 그때도 선거 결과에 많은 사람이 충격을 받았다. 그래도 그때는 핑계라도 댈 수 있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갈라선 게 결정적이었구나' 하는. 그런데 이번에는, 난 지금까지도 (야권이 패한)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이런 집단적 공황 상태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누가 특별히 '뉴스 보지 말자' 이야기한 것도 아닌데 적잖은 국민이 뉴스에서 눈을 돌려버리고 공황 상태에 빠진 것이다. 그래서 요즘, 과거 우리 역사에서는 어땠나 하는 것을 돌아보고 있다.
프레시안 : 역사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자. 한국에서 진행된 과거사 정리 작업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안병욱 : 세계적으로 과거사 정리 작업이 부각된 건 1980-1990년대인 것 같다. 그 전에 비슷한 예가 없던 건 아니지만, 인류사적인 새로운 트렌드가 된 건 그 시기다. 인종차별로 악명 높던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만델라가 집권한 후, 과거의 인종차별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부각됐다. 또한 쿠데타로 집권해 학살 등을 자행한중남미 국가들의 군사 정권들이 뒤집어지면서, 군사 정권 시기의 인권 침해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대두됐다. 그러면서 과거 청산 문제가 세계적 추세가 되고 인류사 전환기의 새로운 역사적 과제로 제기됐다.
20세기 후반에 이뤄진 역사적 전환에는 과거사에 대한 정리와 청산이 필요했다. 프랑스 혁명 때는 지배층을 단두대에 보내 처리했다. 만약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프랑스 혁명 같은 방식의 역사 전환을 하려 했다면 어떻게 됐겠나. 아프리카 몇몇 나라에서 수십 년간 벌어진 내전 형태를 벗어나지 못했을 가능성이 있다.
일각에는 '과거 문제를 왜 들추나? 통합과 화해로 나아가야지, 과거를 헤집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극단적인 비판을 하는 이들도 있다. 그러나 그건 인류사의 전환에 대한 인식 없이 나오는 즉자적인 반대나 비판 논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보수 언론들이 대개 그렇다.
한국은 높은 수준의 과거사 정리를 경험하고 있다. 다른 나라들의 과거사 정리는 대개 특정한 단일 범주 내에서 이뤄졌다(남아프리카공화국은 인종 차별, 중남미 국가들은 군사 독재 극복 등). 그런데 한국은 여러 가지를 복합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게 좀 다르다. 식민지 잔재 청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독재 정권의 인권 침해 등 우리가 예측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부분이 지난 10여 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과거 청산 과제로 제기됐다. 그것들을 손대서 (진실 규명을) 추진했다. (물론) '그 모든 것을 철저하게 했는가'와는 다른 이야기다.
"과거사 진실 규명 무산시키려 한 이명박 정부"
프레시안 : 과거사 진실 규명을 위해 만들어진 기구 중 하나가 진실화해위였다. 이명박 정부 때 진실화해위원장으로 일했는데, 역사 문제를 대하는 이명박 정부의 태도는 어떠했는가.
안병욱 : 2007년 12월 1일 진실화해위원장을 맡았다. 그리고 그달 치러진 대선에서, 과거사 정리 작업을 집요하게 반대해온 한나라당이 승리했다. 그 다음해 정권이 바뀌자마자 이명박 정부는 노무현 정부에서 시작한 모든 것을 부인하는 정치를 했다.
과거사 정책도 그중 하나다. 이명박 정부는 과거사 관련 위원회 14개를 통폐합해 과거사 정책을 일괄 무산시키려 했다. 그 위원회들 때문에 국력이 낭비되는 것처럼 여론을호도했다. 김대중·노무현 정부에서 추진한 과거사 관련 작업들이 성과를 내지 못하고 중단될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가 촛불 집회에 휩쓸리면서 이를 처리할 시기를 놓쳤다. 그 덕분에 위원회들이 애초에 법으로 제정된 기간 동안은 존속할 수 있었다.
그 결과, 법으로 제정된 최소한의 임무들은 마무리했다. 어느 정도 역할을 했는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평가가 다르겠지만 '문을 열었다', '시작이 반이다' 정도의 평가가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진실화해위의 경우, 법을 만들 때부터 한나라당 때문에 이미 '누더기법'이었다. 법을 제안했던 기준에 비춰보면 굉장히 소극적인 법이었다. 예상된 과제를 처리할 수 있을 만한 법이 아니었다. 또한 한국전쟁 시기에 벌어진 비극의 실체를 충분히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만들어진 법이었다. 그 실체는 (훗날) 조사 과정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래서 진실화해위는 해야 할 일의 규모 등에 대해 어느 정도 로드맵이 있었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와는 달랐다. 진실화해위의 작업에서는 애초에 과거사로 정리하고자 했던 요지가 지극히 소략하게 다뤄질 수밖에 없었다. 한나라당 사람들은 그런 방식으로 이 문제를 덮었다고 안도했을 것이다.
고립무원 상태에서 위원회를 운영해야 했기 때문에 그때까지 제기된 부분을 행정적으로 잘 마무리하는 정도의 역할밖에 할 수 없는 측면이 있었다. 그리고 (조사 결과를 토대로) 국가 기관에 여러 가지 권고(과거사연구재단 설립, 한국전쟁 당시 학살 사건 배상 및 보상 특별법 등)를 했지만 어느 기관도 귀담아듣지 않았다. 과거사 정리 작업을 백지화하려던 정부였기에, 권고 사항을 귀담아듣겠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없었던 것 같다.
프레시안 : 진실화해위원장에서 물러난 후 아쉬움이 많았을 것 같다. 후임자인 뉴라이트 출신 이영조 진실화해위원장은 5.18을 "민중 반란", 4.3을 "공산주의자가 이끈 폭동"으로 폄훼해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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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시안(최형락) |
더욱이 후임 위원장은 "위원회의 결정은 100퍼센트 진실이나 정의라기보다는 그 결정이 내려질 당시 위원들 다수의 판단일 뿐", "투표에 의한 진실, 다수결에 의한 진실일 뿐"이라며 진실화해위 결정의 신뢰성을 스스로 훼손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다. 내가 위원장일 때는 대개 15명 위원의 만장일치를 이끌어냈고, 경우에 따라 표결도 했지만 별다른 이론 없이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또한 (이영조 위원장의) 발언들이 훗날 사법부에서 관련 사건 재심을 할 때 검찰 측 근거로 제시되는 경우도 있다고 들었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프레시안 : 사법부의 법적 판단에서 요구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물적 증거를 과거사 정리 작업에서 요구할 수는 없을 것 같은데.
안병욱 : 프리실라 헤이너(<국가 폭력과 세계의 진실위원회> 저자)의 다음 말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뭐가 진실인지 우린 다 안다. 과거사 청산은 그렇게 다 아는 것을 사회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어느 것이 사실이라고 알고 있는 것과 진실을 사회적으로 공인하는 것, 그 차이가 과거사 정리다. 우리는 국정원, 보안사, 검찰, 사법부가 과거에 무엇을 잘못했는지 안다. 위원회는 그렇게 (경험적으로) 다 아는 사실을 공적으로 조사·발표·공인하고, 사법부는 재심을 통해 그걸 다시 인정하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재임 당시 4.3과 관련해 제주도민과 희생자 유족에게 사과한 것처럼 (정치권력이) 국가의 잘못을 시인하는 것, 이것이 과거사 정리의 핵심이다.
그런 측면에서 사법부와 과거사위원회는 다르다. 사법부는 형사재판에서 심증이 가더라도 명확한 증거가 없으면 처벌하지 못한다. 그런데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문제에 사법부식으로 접근한다면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피해자는 분명히 존재하는데 명확한 문서 기록은 없는 경우가 많지 않나. 사법부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증거에 입각해 처리할 수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합리적인 수준에서 판단하라고 있는 것이 과거사위원회다. 또한 항시적 기구인 사법부와 달리 과거사위원회는 한시적으로 운영한다는 점도 다르다.
"박근혜의 과거사 기준은 박정희 명예 회복"
프레시안 : 박근혜 정부 출범 후에도 과거사 진실 규명은 필요한 작업이다. 박 당선인은 대선 과정에서 인혁당, 정수장학회 등의 문제로 곤욕을 치렀다. 다른 한편 박정희 정권 때 일어난 부마항쟁 관련자 및 긴급조치 피해자 명예 회복에 관한 법안들을 대통합 법안으로 제시했다. 박근혜 정부에서 과거사 문제는 어떠할 것이라고 전망하는가.
안병욱 :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이 세 사람이 과거사 문제를 대한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노 전 대통령은 과거사 정리 작업을 국가 정책으로 적극 추진했다. 어느 정부보다 적극적이었다. 노 전 대통령이 예전부터 과거사 문제에 남다른 관심이 있어서였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때가 비로소 우리가 과거사 문제의 뚜껑을 열 수 있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이명박 정부는 과거사 문제에 관해 아무런 의식이 없는 멍청한 정부였다. 역사에 관해선 백치 수준이었다. 졸부 근성밖에 없었다. 이 대통령이 과거사 문제에 특별히 이해관계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과거사 정리 작업을 노무현 정부 때 했으니 그걸 뒤집어야 한다는 식으로 접근했다. 그래서 과거사 관련 위원회들을 통폐합하려 했는데 못했다. 그 후 (드러내놓고) 특별히 과거사 위원회를 못살게 굴기보다는 우리가 요청하는 사항들을 아무것도 들어주지 않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박 당선인은 노 전 대통령과 반대편에 서 있다. "박근혜가 정치를 하는 건 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해서다"라는 말이 새누리당에서 나오지 않았나. 그게 박 당선인의 핵심 키워드다. 과거사 문제도 '박정희 명예 회복'이라는 기준에서 다룰 것이다. 그런 면에서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보다 더 과거사와 관련해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다. 다른 어느 때보다도 적극적으로 밀고 당기는 역사 전쟁, 투쟁이 전개될 것이다.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 문제도 그 범주 내에서 똑같이 다뤄질 것으로 본다.
프레시안 : 이명박 정부가 과거사 문제에 대한 의식이 없었다고 볼 수 있을까? 건국절 논란, 역사 교과서 수정 압박 등의 문제가 계속 발생하지 않았나.
안병욱 : 분명히 이명박 정부가 들어선 후 과거사 관련 성과를 제거하고 자기들 입맛에 맞게 재편하려 하는 움직임이 있었다. 역사 교과서에 대한 터무니없는 이념 공세도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예컨대 5.18에 대해서도, '독재에 맞선 시민들의 민주화 투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고 '왜곡된 정보를 받아들인 소수의 폭동'으로 몰아가려는 시도도 나타났다. 역사의 진실을 뒤바꾸려는 범죄다.
(하지만) 건국절 논란 같은 것들을 보면, 그건 이 대통령의 의지라기보다는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뉴라이트들의 이념 공세에 MB가 별다른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편승한 측면이 있다. 이른바 보수 세력의 뿌리를 튼튼히 한다는 측면이 강하게 작용한 일이었다. (이와 달리) 인혁당 사건, 정수장학회 등은 박정희와 직접 연결된 사안이다. 뉴라이트들로선 그런 부분까지 변명해줄 필요가 없다. 그런 과거의 명확한 인권 침해까지 감싸려 하면 자기들의 입지가 약해지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박 당선인은 박정희와 직결된 문제 하나하나에서 다를 것이다. 인혁당에 대해서도 두 개의 대법원 판결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선거 초기에 그런 이야기를 하다가 문제가 생기자,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사과 담화를 발표했다. (그러나) 그 기자회견 내용을 엄밀히 따지면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반성이나 사과가 전혀 아니다. 박근혜 당시 후보의 말은 유권자를 상대로 한 면피성 발언일 뿐, 진정성이 드러난 부분은 없다. 앞으로 과거사 문제에서 혹시 박 당선인이 양보한다고 하더라도, 그건 박정희 시절에 대한 명분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이뤄지는 최소한일 뿐 우리가 말하는 과거사 정리의 뜻에서 출발하는 내용은 결코 아닐 것이다.
예컨대, 정수장학회와 관련해 박 당선인은 후보 시절 "김지태 씨는 부정부패로 지탄받던 사람으로, 처벌받지 않기 위해 먼저 재산 헌납의 뜻을 밝힌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것에서, 박 당선인의 뜻이 어디 있는지 명확하게 드러난다.
프레시안 : 박 당선인은 후보 시절 "이제 아버지를 놓아드렸으면 한다"고 말했다. 시쳇말로 박정희 전 대통령을 그만 걸고넘어지란 이야기다. 어떻게 보는가.
안병욱 : 삼국시대든 고려시대든 조선시대든 훗날 역사를 놓아준다는 것은 개념상으로 존재할 수가 없다. 가능하지 않다. 다만 박정희 시대에 대해 감성적 접근에서 역사적 접근으로 전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할 수는 있다. 그런데 왜 아직도 박정희 시대에 대해서는 우리가 감성적 접근에 상당히 구애받을 수밖에 없느냐 하면, 박정희에 대한 역사적 평가가 아직 이뤄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여전히 박정희 시대에 대한 오도된 환상이 끊임없이 영향을 끼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해방 이후 마치 박정희가 없었으면 한국 현대사가 존재하지 못했을 것처럼 과도하게 전제하는 것이다. 박정희를 팔아서 먹고살려는 의식이 많은 사람에게 존재하는 한 박정희는 끊임없는 논쟁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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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전 대통령과 박근혜 당선인. ⓒ연합뉴스 |
"박정희 팔아서 먹고살려는 의식 있는 한 논쟁 대상 될 수밖에 없다"
프레시안 : 박 당선인은 대선 때 노무현 정부에 대해 '민생과 상관없는 이념에 빠져 나라를 두 쪽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국가보안법, 사학법, 과거사 진실 규명 논란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들렸다. 노무현 정부에 대한 호불호와 별개로, 당시 개혁 과제로 꼽혔던 사안들이다. 그와 같은 발언을 어떻게 보는가.
안병욱 : 사학법이 논란이 됐을 때 박 당선인은 문자 그대로 자신의 모든 걸 던져 사학 재단들의 입장을 관철시켰다. 사학 재단들은 기득권 세력의 대표적 표상 아닌가. 이런 박 당선인이 앞으로 어떤 정치를 할까? 개인적으로 전율이 일어날 정도로 박 당선인의 보수적·수구적 행태가 드러날 것이라고 본다.
국가보안법 부분도 문제다. 박 당선인을 비롯한 그쪽 세력은 거의 대부분 국가보안법을 왜 바꿔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한다. 1950년대식 사고에서 한 치도 벗어나기 못했다. 백보를 양보하더라도 이미 21세기에서도 10년 넘게 지난 지금 여전히 국가보안법을 붙들고 있는 역사의식을 가지고 어떻게, 세계화 시대에 한국 사회를 이끌어갈 것인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19세기에 조선의 많은 지식인들이 위정척사론적인 사고 속에서 세계사의 변화에 대응하려 했던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행태다.
프레시안 : 과거사 정리 작업의 기반은 역사에 대한 사회 전반의 올바른 인식이다. 그런데 '5.18도, 6월항쟁도 잘 모르는 20대가 늘어 걱정'이라는 이야기가 들린다.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친 교수로서 이 문제를 어떻게 보는가.
안병욱 : 주위 사람들이 '젊은이들이 5·18도, 유신도 모른다'고 하는데 난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대개 1990년 이후에 출생한 친구들인데, 5.18이나 유신은 태어나기도 전에 있었던 일이다. 역사책에서 봤을 뿐인 이들에게 그런 상황을 겪었던 사람과 똑같은 감성을 가지라고 할 수는 없다.
물론 1970-1980년대에 일부 젊은이가 역사의식을 갖추고 유신 반대 운동, 전두환 반대 운동을 했던 것은 자랑스러운 일이다. 소중한 유산이다. 그렇지만 그건 비상한 사태에서 나타난 특수한 측면이다. '지금 학생들은 그때보다 못하다'는 식으로 비교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다만 '왜 6월항쟁이나 광주항쟁이나 유신 체제를 오랫동안 당장의 현실로서 이야기하는가', 문제는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보수 기득권 세력이 과거의 틀 속에서 한국 사회를 계속 끌고 가려고 하는 것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다. 3.1운동이나 갑오농민전쟁 같은 것들은 이미 그 자체로 역사 속에서 단락을 지어 나아갈 수가 있는데, 박정희-박근혜 문제는 그렇지 않다.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것의 90% 이상은 박정희의 딸이라는 점 때문 아닌가. 한국 정치는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의 지형에서 약간의 변화만 있을 뿐 50년 넘게 그 틀이 바뀌지 않고 있다. 조선 사회가 성리학적 구조 속에서 500년을 지속하며 야기했던 문제들의 변형을 보는 것 같다.
아울러 왜 요즘 일부 학생들이 과거사 문제 등에 대해 올바르지 않은 주장을 하는 것인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상당 부분은 보수 언론의 왜곡된 보도 형태 때문이라고 본다. (끝)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130109175226§ion=03&t1=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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